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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 그리고 사케

도정과 물레방아

기원전 400년경, 중국과 한국에서 단원립 자포니카 쌀이 유래된 후 약 17세기까지 쌀은 사치품으로 취급되었고 쌀이나 쌀로 만든 상품(사케 등)은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한편, 귀족과 상류 계층은 그 쌀의 품질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백미와는 크게 달랐으나 쌀을 즐기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손이나 발로 작동하는 도정 기구로 가볍게 깎아 내거나 중간 정도로만 깎아 내는 것을 선호했기에 17세기까지는 고급 도정 기술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습니다. 중산층에서 쌀과 사케를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시기와 이러한 필요성이 맞물리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쌀에서 깎아 내지 않은 단백질과 미네랄은 사케의 향과 외양에 중대한 차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사케 양조에 관한 이전의 낮은 도정률은 다양한 생산 시기 의 사케들 사이에 큰 차이를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600년대 나다의 진취적인 양조업자들이 도정률과 성공적인 양조의 관련성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훗날 도정에 물레방아를 도입하면서 업계에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도정용 물레방아는 7세기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본에 전래되었지만, 도정 방식의 개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은 일본인들이 식용 및 사케 주조용 쌀을 모두 바꾸고 개선하고자 했던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생겨났습니다. 18세기에는 진취적인 나다의 사케 양조업자 야마무라 다자에몬이 공식적으로 물레방아 도정 방식을 채택하여 업계에 혁신을 불러왔습니다. (야마무라 다자에몬은 발효 과정에서 미야미즈 사용의 장점을 발견한 공로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나다의 양조업자들은 곧 하루에 더 많은 쌀을 도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도정률로 쌀을 깎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추정치에 따르면, 한 사람이 발로 작동하는 대중적인 도정 기구 "아시후미"를 사용해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쌀의 양은 90% 도정된 쌀 23~24kg이었습니다. 하지만 물레방아를 사용하면 하루에 2,400kg의 쌀을 80%의 도정률로(20%를 깎아 냄) 도정할 수 있었습니다. 도정률이 개선된 쌀로 만들어진 사케는 "탄레이"(부드럽고, 산뜻하고, 상쾌한 맛) 품질로 평가받으며 감정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 물레방아의 수력은 현대 기술로 대체되었으나, 나다 양조업자들과 그 사케는 이미 선구자 정신과 품질 향상을 위한 헌신으로 유명해진 후였습니다. 이 정신은 하쿠시카와 사케 양조 기술을 개선하고 완성하려는 당사의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